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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찬
2012년 03월

선정호 : 63호

업종 : 기계

주 생상품 : Vision Screen Prenter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58명), 매출액(215억원)

회사주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암동 1-23

홈페이지 : http://sjinnotech.com/

학력사항

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82)


소속업체

㈜에스제이이노테크

특허 및 실용신안

- 특허(단독10건)
제10-0505315호 “스크린프린터기용 PCB 클램핑장치”
제10-0419460호 “PCB 마운트 라인용 파레트 캐리어시스템”
제10-0505314호 “스크린프린트기용 스퀴이지 압력 및 속도조절방법”
제10-0843782호 “스크린프린트기용 스텐실마스크 클리너”
제10-0892001호 “스크린프린트기용 스퀴이지 어셈블리”
제10-0994199호 “태양전지용 웨이퍼 프린트 장치”
제10-1000902호 “메탈리제이션 솔라웨이퍼 스크린프린터”
제10-1000904호 “웨이퍼 검사용 컨베이어 장치”
제10-1018675호 “솔라셀 웨이퍼 프린트기의 스퀴지 각도조절장치”
제10-1075252호 “스크린 프린터” 등
- 실용신안 6건 등
- ISO9001, ISO14001 인증 획득 

주요경력

- ’82. 03. ~ ‘84. 04. 정경유압(주) / 사원
- ’89. 07. ~ ‘89. 02. (주)유천 / 계장
- ‘89. 03 ~ ’95. 01. (주)키메닉스 / 대리
- ‘95. 05. ~ ’97. 07. 태원엔지니어링 / 과장
- ‘97. 10. ~ 현 재 (주)에스제이이노테크 / 대표이사 

주요수상내역

- 산업자원부장관 (‘07) “무역진흥유공”


소개

"기존에 독일과 일본 장비로만 사용해 오던 전자동화 비전스크린프린터를 국산화했지만 여기에서 만족할 순 없죠. 2015년까지 스크린 프린터(Screen Printer)업계 1위가 제 목표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기술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자신 있습니다."

대구에서 PCB 자동화장비생산업체 (주)에스제이이노테크를 운영하고 있는 정형찬(48)대표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힘이 느껴졌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예순세 번째 이 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정형찬 대표를 선정했다. 58명의 직원, 연매출 215억원 규모의 (주)에스제이이노테크는 반도체 관련 장비와 초정밀 자동화 설비 등 다양한 검사장비 제조 경험으로 비전 인식 자동화설비 분야의 첨단 기술력을 보유, 중국 및 동남아, 유럽, 남미, 일본 등 세계 23개국으로 비전스크린프린터를 수출하고 있다.

기술개발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2007년부터는 태양전지 금속피복 제조 시스템(Solar-Cell Metallization In-Line System)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뿐 아니라 해외로 시장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고 있으며, 2008년에는 본격적으로 회사 내에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해 ‘현장 실무 경험자’를 연구원으로 포진,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 대표는 경상북도 청도 출신으로 3남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정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구니와 죽부인등 대나무 가공 손 공예 일을 하던 부친을 도와 동네 어귀 산에서 베어진 대나무를 들어 나르기에 바빴다. 어린 꼬마는 학교만 파하면 해질녘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산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억센 모기떼 같은 벌레가 유독 많던 대나무밭에서 씨름하는 게 학교생활 외에 전부였던 정 대표는 지금도 ‘대나무’는 쳐다보기도 싫단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그는 막연히 중학교 교육이 끝일 것이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고 이는 그를 지레 자포자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학은 꿈조차 꿀 수 없던 상황에 그는 중학교 졸업 후 기능인 양성을 위한 무상교육이 가능하다는 경북기계공고에 지원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 유일한 희망도 잠시, 소년은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간 공고 생활에 쉽게 적응 하지 못했다. 기술이나 공업교육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적응이 아니라 본인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반발심으로 2~3학년 2년 내내 혹독한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학교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었어요. 그저 제 상황에 대한 불만이 컸어요. 어릴 때부터 공부 욕심이 있었거든요. 그걸 할 수 없다는 제 상황에 대한 반발심으로 모든 걸 놓고 싶었던 청소년기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고민이라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땐 혹독했고 힘에 겨웠다. 공부를 열심히 안하다보니 결과도 안 좋았고 그러나보니 점차 자신감도 떨어졌다. 졸업도 겨우겨우 했단다. 졸업 후 5년 여간은 대구와 인천, 청주, 마산, 창원 등 전국 각 지역의 중소기업을 떠돌며 일을 했다.

“그 때까지도 실상 방황기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니 딱히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녔죠. 5년간 8번 회사를 옮겨 일했을 정도니까요. 아무 생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들었어요. 나도 뭔가 안정을 찾아 내 삶을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그때부터 내 삶에 애정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그는 연고가 있는 대구의 포장 자동화설비회사 (주)유천에 굳은 각오로 취직을 한다. 작은 기술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공고시절과 이곳저곳 다니며 어깨너머로 익힌 기술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새로운 기술은 열심히 습득했다.

“그 때 아마 2년간 다른 사람들이 10년간 일할 분량을 한 것 같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미친 듯이 일했죠. 기술뿐 아니라 닥치는 대로 다른 부서의 업무까지 파악하고 익혔어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때부터 제2의 삶이 시작되었죠.”

결국 ‘열심히’는 좋은 결과를 주었고 이는 성취감으로 그리고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정 대표는 그 즈음 핸드폰과 TV, 노트북 등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인쇄 회로기판 자동화 설비회사 (주)키메닉스에 스카우트됐고 입사 6개월 만에 우수한 평가를 받아 생산관리 팀장이 된다.

그는 근 6년간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리고 사업이라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된다. 95년, 33살이 되던 해 정 대표는 동료 한명과 각각 1,500만원씩 투자해 산업자동화설비회사 ‘태원엔지니어링’을 차렸다. 영업과 인력관리 등으로 초기 난항을 겪던 이 회사는 1년이 지나자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동업의 한계에 부딪혔다. 고심 끝에 결국 정 대표는 2년 만에 태원엔지니어링을 접고 97년 10월 1,000만원으로 혼자 사업체를 꾸린다.
“그런데 하필 그때가 IMF이었어요. 워낙 일 물량 자체가 없던 시기라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심란했죠. 다행히 저하고 직원 1명 이였으니 먹고는 살았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고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99년이 되자 시장은 다시 호전되기 시작했다. IMF때 경쟁업체의 도산과 해외 이전으로 국내업체가 턱 없이 부족하다보니 정 대표는 그 덕을 볼 수 있었다. 그간 갈고 닦은 기술력이 탄탄하다보니 일감이 넘쳐 직원을 7명으로 늘렸다. 4년간은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비전 스크린 프린터 제작의 선발주자가 해외 업체이다 보니 개발 직전 처음엔 국산 설비가 되겠냐는 의구심으로 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초기에 그 틀을 깨기 위해 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구 개발에 몰두하며 기술력 향상에 매진했죠. 그 때부터 고객과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신뢰를 얻은 고객들은 더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 하며 더 좋은 장비가 생산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그 발판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습니다.”

정형찬 대표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비전스크린프린터가 안정되자 2007년부터 신시장 개척을 위해 태양전지 금속피복 제조 시스템(Solar-Cell Metallization In-Line System)개발에 나섰다. 인도에서 개최된 장비출품전시회에서 동영상과 카탈로그를 본 순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들끓는 자신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지만 모두가 불가능 하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는 2년간 약 20억원을 투자해 개발에 매진, 태양광 장비산업 국산화에도 성공했다. ’08년부터는 사내에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현장 실무 경험자’를 연구원으로 발탁하여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술개발’을 통해 10건의 특허와 6건의 실용실안을 획득하게 된다.

“시대가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릴 때 기술들을 배우면서 이걸 어디다 써먹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는데 사업을 하다 보니 그 때 익혔던 작은 기술, 연구 개발 과정 하나하나가 제 자산이 돼버렸습니다. 특히 풍부한 현장경험은 폭 넓은 사고를 하는 관리자가 되는데 큰 몫을 해주고 있습니다.”

정형찬 대표가 기능인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다. 기능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졌다. 해외시장까지 점유하여 업계 1위 기업을 목표로 여전히 꿈을 꾸는 정형찬 대표, 그의 표정이 봄볕처럼 따스하고 푸른 하늘처럼 유난히 맑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