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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규
2012년 11월

선정호 : 71호

업종 : 전자

주 생상품 : CCTV 및 교통통제장비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97명), 매출액(160억 원)

회사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 29

홈페이지 : http://www.topes.co.kr/html/common/main.asp

학력사항

남산공업고등학교(’73)(現 리라아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원 최고위 과정 수료 (2007.12)
몽골 국립대학 명예경영 박사학위 수여 (2011.07)


소속업체

(주)토페스

특허 및 실용신안

특허, 실용실안 취득 및 국제규격 ISO 인증 등
- 특허 (공동 5건)
제10-0199402호 “교통감시화상 온라인시스템 및 그 방법”
제10-0521303호 “복합 영상 처리 장치”
제10-0560125호 “ITS에서 센터와 로컬 장비 간의 통신 구조 및 방법
제10-1013466호 “줌 렌즈의 화각을 이용한 자동 조명 제어 시스템”
제10-0956978호 “교통사고 유의지역 통합관리 시스템”
- ISO9001·14001“무인교통 감시카메라장치, 영상식 차량검지기, CCTV의 설계, 개발, 생산 및 설치“ 

주요경력

- ‘74. 03 ~ ’75. 12 동진전기공업(주) / 사원
- ‘76. 02 ~ ‘81. 12 오리엔탈전자공업 / 과장
- ‘81. 12 ~ ‘84. 02 오리엔탈판매(주) / 부장
- ‘84. 02 ~ 현 재 (주)토페스 / 대표이사 

주요수상내역

○ 자격취득 및 기능경기 입상실적
- 정보통신기술자 고급 (‘11) : 정보통신공사협회
- 전자기기기능사 (‘73)
○ 포상
- 지식경제부장관 (‘08) “모범 상공인”
- 한국도로공사 ('10) "ITS 선진화 공로상" 

소개

한적한 고속도로를 따라 남양주시에 있는 (주)토페스(이하 토페스)의 사옥으로 가는 길, 임철규 대표는 도로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무인교통단속 카메라를 가리키며 제품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CCTV 전문제조업체 토페스는 현재 국내에 설치된 무인교통단속시스템 및 교통정보시스템의 90%를 공급하고, 중화학 공업 생산라인용 감시 카메라의 95%를 납품한다. 30년 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인류의 행복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해온 임철규 대표(이하 임대표)는 이제 100년 역사를 가지는 토페스의 미래를 꿈꾼다.
임 대표는‘56년 충북 음성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대병원에서 두 차례나 다리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 다니느라 학교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임 대표는 잘 걷지 못하고 활동적이지 않아서 교실에 조용히 앉아있던 학생이었다. 대신 집에 가면 라디오나 온도계 등 눈에 띄는 신기한 물건들을 전부 뜯어서 관찰했다. 다시 맞추지 못하고 망가뜨려 혼나기 일쑤였지만 임 대표의 호기심은 줄어들지 않았고, 실수를 겁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이사해 남산공업고등학교(현 리라아트고등학교) 야간 전기과에 진학했다. 1학년 때 종로 3가에 있던 전자학원에 다니며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의 구조를 배우고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다. 라디오를 조립하느라 번번이 밤을 꼬박 새웠다. 임 대표는 소문난 오디오 수리기사가 되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 월급은 12,000원이었다. 임 대표는 직접 만든 라디오를 팔아 한 달에 25,000원을 벌었다.
“몸 때문에 앉아서 하는 일 밖엔 할 수 없었습니다. 시계 수리나 금속 세공을 할 수도 있었는데, 라디오만 눈에 들어왔어요. 하드웨어를 만드는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원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죠. 일이 아니라 놀이었어요. 잘 놀다보니 돈이 생긴 거죠.”
실력은 있었지만 장애가 있던 임 대표에게 취업의 문턱은 높았다. 면접을 보기만 하면 떨어져서 큰 회사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임 대표는 동네 전파사 주인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취업을 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74년 오디오를 만드는 신생 기업 (주)동진전기공업 생산부에 취업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낮에는 전파사 일을 하고, 밤에는 회사에서 고장 난 오디오를 고치는 생활을 했다. 당시에는 새로 기술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일본 제품을 카피해 오디오를 생산하는 일이 흔했다. 기술이 없으니 회로 설계부터 문제가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수리 경험이 많았던 임 대표는 생산 단계에서 불량이 난 오디오를 고쳤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현장 생산라인에서 개발실로 자리를 옮겼다.
‘76년 임 대표는 (주)오리엔탈전자공업으로 스카우트되어 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 회사는 원래 작은 가발공장이었다. 가발 수출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회사가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아 갑자기 오디오를 생산하게 되었다. 임 대표처럼 현장 생산경험이 있는 기술자가 꼭 필요했다. 임 대표는 그 회사에서 일하며 기술개발과장, 품질과장, MD 등 5개 부서 과장을 겸임했다. 가발을 만들던 노동자들에게 회로 기판 제작 방법을 교육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곳에서 개발 실력뿐 아니라 회사가 돌아가는 사정까지 두루 익힐 수 있었다.
회사에서 공정관리의 효율성을 위해 일본에서 CCTV를 들여와 생산라인에 설치했다. 임 대표는 그 때 카메라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오디오를 분해하듯 CCTV를 뜯어봤는데 다시 조립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국내 최초 CCTV 개발팀을 조직해 카메라를 연구했다. 결국 국산화해 성공해 그때 개발한 카메라를 청와대에 전시하고, '77년에는 상용화에 성공해 CCTV를 생산했다. 하지만 CCTV는 팔리지 않았다. 기기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필요성이 널리 인식되지 않았다. 임 대표는 직접 특판부서를 꾸렸다. 개발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제품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했는데 영업 분야만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게다가 사장이 수술한 다리 때문에 못 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대한 오기도 있었죠.”
다음 날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회사에서 처음으로 CCTV 7대를 판매했다. 임 대표는 영업을 하기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주로 병원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구두 계약을 하고 물건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납기가 늦어져 고객이 회사에 항의를 하고 임 대표는 그 일에 대한 책임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퇴사한 후 임 대표는 집에서 당시 유행하던 게임기 조이스틱을 만들어 청계천에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부하 직원 2명이 임 대표를 찾아와 자신들이 개발과 영업을 도와줄 테니 회사를 설립하자고 설득했다. ‘84년 임 대표는 국내 최초로 CCTV를 개발한 경험과, 5개 부서에서 과장을 맡으며 익힌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자본금 1,200만원으로 오리엔탈전자시스템(주)(현 토페스)를 창업하고 카메라 개발에 몰두했다.
당시 국내에는 산업용 CCTV를 생산할 만한 업체가 없어서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위험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안전을 지키고, 공정 감시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데 ITV 시스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임 대표는 이 기술을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중공업 회사를 영업 타깃으로 잡았다. 산업용 ITV를 개발해 4년 동안 수주에 노력한 결과, 대기업에 중화학 공업 생산라인에 감시 카메라를 공급할 수 있었다. 또한, 제철소에도 생산공정 감시 시스템 등을 납품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신뢰가 생겨 대기업과 계약을 맺고 공장과 발전소 건설에 ITV 시스템을 납품하고, 해외 플랜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88년 임 대표는 매출액의 20%를 교통통제장비 연구에 투자하여 국내 최초로 무인 교통단속장비 및 영상식 차량 검지기를 개발했다. '94년에는 이 장비들을 상용화해 전국 도로에 무인교통단속 시스템을 구축했다. 9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전 세계 교통사고 사망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광전송 방식을 이용한 컬러 카메라 시스템을 교통관제용으로 전국 지방경찰청에 공급함으로써 교통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토페스의 기술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미국 시카고에 100만 달러 규모의 신호위반 시스템을 수출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몽골의 ITS(종합교통통제시스템) 사업에도 참여하며 교통 분야에 독보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몽골 정부 책임자들에게 1년 이내에 교통질서를 확실히 잡을 수 있고, 통행속도도 15%이상 증가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6개월도 되지 않아 몽골 울란바토르 시에 교통질서가 잡혀서 훈장을 받았습니다.”
임 대표에게 회사를 운영하며 어려움이 없었는지 물으니 임 대표는 ‘97년 IMF 구제금융 시기를 말했다. 당시 환율은 1달러에 846원 정도였다. 그런데 구제금융을 받은 시점에 환율이 1,800원 대로 치솟았다. CCTV를 제작하기 위해서 하드디스크를 수입하는 데 18억 원 가까이 손해를 봤다. 협력업체에 정상적으로 결제를 할 수 없었다. 거래처에서 결제일을 미뤄주지 않으면 회사를 매각해야 했다. 협력업체 대표들과 모여 회의를 했다. 의견을 물어보니 대부분 결제를 3년 동안 미뤄도 좋으니 같이 일하자고 대답했다. 협력업체들이 도와주고, 은행에서 추가 여신을 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동안 회사가 쌓아온 신뢰 덕분이었다.
“제품의 품질에는 자신 있습니다. 성능검사를 받으면 불합격률이 제일 적어요. ‘94년부터 모 중공업에 공급하는 저희 회사 제품은 안전검사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영업의 80% 정도가 같이 일했던 고객들의 소개로 이루어집니다.”
회사가 성장해 이전처럼 매출액의 20%까지 연구개발에 투자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매출액의 3%를 꾸준히 연구개발에 쓴다. 사업 분야를 확장해 회사의 몸집을 키우기보다 한 분야에 집중해 탄탄한 기술 인프라를 구축하는 길을 택했다. 그렇다고 현재 상태에 안주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 개발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죠. 동종 업종 간에 경쟁으로 영향을 받는 회사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는 분야를 노리고, 대량 소모되는 것은 만들지 않아요. 고객의 요구에 맞추어 거의 새로운 제품을 만듭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을까. 임 대표는 우수한 직원들이 많아서 자신은 가능하면 듣는 입장이 되어 과거의 경험을 살려 아이디어를 내놓는 때가 많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올해 말 경찰청에 납품할 교통 단속용 무인 장비를 보여주며 임 대표가 어떻게 제품 개발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는지 설명했다. 장비 크기는 줄이고, 온도 상승으로 기기 고장을 방지하기 위해 설계를 보완했다. 내부에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필터를 설치하고, 도로변에서 기기를 점검하는 도중발생하는 인명 사고를 예방하려고 개폐장치에 고정 핀을 달았다. 수십 년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일해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발상이다. 그 외에도 장비의 유지․보수 편의성을 위한 아이디어로 가득했다. 사소한 것에도 신경 쓰는 임 대표의 세심함이 엿보인다.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오래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데이터를 많이 가지고 있으니 강점이 되고, 경쟁력이 될 수 있죠.”
아는 분야가 이것 밖에 없어서 계속 해왔다며 웃으며 말했다. 임 대표는 직원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한다. 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도 지원자가 얼마나 끈기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본다. 토페스의 인재상은 ‘시대 변화를 주도할 자기계발형 인재’다. 교육은 평생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1년 단위로 교육 계획을 세우고, 분기 별로 2번 전체 교육을 한다. 그 외에는 맡은 업무와 흥미에 따라서 원하는 분야를 배울 수 있도록 개인의 선택에 맡겼다. 그러니 직원들마다 교육 받는 내용이 전부 다르다. 환경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일하고 싶은 업무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간 배치에도 신경을 쓴다. 직원들은 임 대표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다. 임 대표는 직원들과 함께 ‘인류의 행복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써 100년 기업의 역사를 만들 토페스의 미래를 꿈꾼다.
마지막으로 임 대표에게 인생 선배로써 기술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지금까지 제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이 길을 걸었습니다. 열정을 가진다면 하루 이틀 밤을 새워도 괜찮아요. 즐길 수 있으니까요. 학생들이 진로를 정하지 못해서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를 방황하며 보내는 게 안타깝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실무 경력을 쌓다보면 자기가 하는 일이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는 일인지 판단할 수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고, 진로를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