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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흔
2016년 07월

선정호 : 113호

업종 : 제조업

주 생상품 : 약과/유과/전통한과

사업장 규모 : 상시 근로자 수(19명), 매출액(약 49억)

회사주소 :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먼재길 62

홈페이지 :

학력사항

신한대학교(2015)


소속업체

신궁전통한과

특허 및 실용신안

(특허)

제 0333839호 “저장성 및 식감을 증진시킨 유과 제조방법”(공동)
제 114455호 “쌀을주성분으로하는약과및제조방법”(단독)
제 0505790호 “조직경화가 지연되는 약과의 제조방법”(공동)
제 10-1463696호 “녹차를 함유한 전통약과 및 그 제조방법”(단독)
제 10-1487245호 “홍삼을 함유한 전통약과 및 그 제조방법”(단독)

주요경력

- ‘81 ~ ’96 신궁제과 / 대표
- ‘95 ~ 현재 신궁전통한과 / 대표
- ‘05 ~ 현재 한과문화박물관 한가원 / 관장 

주요수상내역

- 대한민국명장 선정(2013)
- 식품명인 지정(2009) / 농림수산식품부장관
- ‘농식품 파워브랜드 대전’ 동상입상(2009)
- ‘한국전통식품 Best5 선발대회’ 금상수상(2004)
- 석탑산업훈장 수훈, 대통령 포상(2003)
- ‘한국전통식품 세계품평회’ 금상수상(2000)
- 신한국인 선정 및 시상(1995) / 대통령
- 가공식품부문 산업훈장 수상, 대통령 포상(1995)


소개

2016년 7월 이달의 기능한국인 수상자 신궁전통한과의 김규흔 대표는 국가지정 한과명인이자 대한민국 한과명장 1호(약과분야)로 35년간 오로지 우리나라 전통과자인 한과를 만들어 왔다.

특히 국내 유일의 한과문화박물관인 ‘한가원’을 설립해 한과의 대중화와 세계화는 물론 한과 인력을 양성하는데 열정을 다하고 있는 농산물 가공 산업 분야의 선각자다.

운명처럼 시작된 한과 제조 35년 외길 인생
김규흔 대표가 한과 제조를 평생 직업으로 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평범한 직장인 시절 운명처럼 시작됐다. 김 대표가 세 들어 살았던 집 주인이 그에게 한 여자를 소개해줬다. 그녀는 김 대표를 만날 때마다 약과를 조금씩 가져다주곤 했다. 그녀가 준 약과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준 한과 맛이었고 운명처럼 그녀와 결혼까지 하게 됐다.

“아내를 처음 만난 당시 아내의 형부가 한과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형부의 동생이 군대를 가게 되자 저에게 공장 일을 도와달라고 했죠. 공장의 관리자로 시작했는데 어린 시절 한과 맛이 떠오르면서 한과를 만들고 싶었죠. 약 2년간 공장에서 한과를 배운 후 저만의 한과를 만들기 위해 독립했습니다.”

1981년 서울 월계동에 있는 한 제과 공장의 15평 정도의 공간을 임대해 ‘신궁제과’라는 브랜드로 출발했다. 한과 제조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주문도 늘어나면서 지난 1988년 의정부에 어엿한 공장을 설립했다. 의정부 공장으로도 늘어나는 주문을 맞추기 힘들어 남양주의 한 제과 공장의 일부 공간을 임대해 주문량을 적기에 납품할 수 있었다. 원 없이 한과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의정부 공장을 매각하고 지금의 포천 공장으로 확장 이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걸어온 길은 협소하고 걸음은 달팽이처럼 더뎠습니다. 운명처럼 시작된 한과와의 만남이 길이 되었고 오직 그 길만이 전부인 양 다른 갈림길은 보지 못한 채 우직하게 걸어오다 보니 어느새 3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명인과 명장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얻었지만 사실 과거에도 한과를 만들었고 미래에도 한과를 만들 사람일 뿐입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적성에 맞는 한과 제조라는 길에 평생 매달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끊임없는 신제품‧기술 개발
김 대표는 한과 제조의 길로 들어서면서 많은 난관을 맞았지만 오로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과를 만들겠다는 ‘열정’, 기존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남들이 가지 않는 험난하고 새로운 길을 가고자 하는 ‘변화’로 성공 신화를 써나갔다.

“한과 제조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경쟁업체들을 이기기 위해선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꾸준하게 새로운 한과들을 개발했어요. 우리나라 한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모두 제가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때 한과류 협력업체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과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세계인이 좋아하는 재료인 초코를 활용하면 전 세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과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퓨전 한과인 ‘초코한과’를 개발해 특허를 냈다.

하지만 10년 후 동종업계에서 특허 무효소송에 휘말렸다. 그는 한과업계의 발전을 위해 스스로 과감하게 특허를 취소해 타 업체들도 초코한과 제조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한과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또 더 많은 제품개발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고 더욱 다양한 제품 개발에 도전했다. 그 계기로 탄생한 것이 인삼‧녹차 유과, 키토산 유과 등의 기능성 한과였다. 모자이크 깨강정, 금귤정과, 녹차약과, 인삼유과, 단호박약과, 백년초현미강정 등 현재까지 170여종의 기능성 한과를 만들었다.

가루가 떨어지는 유과의 단점을 보완해 개발한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쏙쏙이유과(방울유과, 볼유과, 한입유과)’는 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김 대표는 한과(유과)의 단점인 짧은 기간의 저장성을 개선한 포장기술을 개발해 유통기한을 3개월에서 1년까지 연장할 수 있게 했다. 또 다양한 재질의 포장 봉투에 상추를 넣어 수많은 실험을 한 끝에 한과를 개별(낱개)로 포장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습기를 차단하는 등 한과의 품질을 높였다.

그는 한과 제조 시 인건비를 절감하고 한과의 맛을 규격화하기 위해 모든 생산 공정에 컨베이어 벨트를 설치하는 등 6년간 공정 하나 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한과생산자동화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대량생산으로 원가를 절감해 한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김 대표는 25년 전 유통을 공부하면서 미래에는 유통을 잘 활용하는 자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일찌감치 백화점, 농협, 편의점, 한과카페 등으로 유통망을 다양화 했다. 한과를 선물용 세트제품으로도 개발해 농산물 가공식품의 고급화로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도 창출했다.

김 대표의 한과가 최고의 맛을 내는 비결은 그의 제작 노트에 있다. 한과 제조를 시작하면서 써온 노트에는 그동안의 한과 제작 상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내일이 약과를 만드는 날이라고 하면 제작노트 3년 치를 꺼내서 확인합니다. 2012년 2월14일 약과를 만들 때의 온도와 습도가 어땠는지, 어떤 레시피로 만들었는지, 그 맛은 어땠는지 등 3년 치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내일의 날씨를 감안한 레시피를 조정해나가는 것이죠.”

그의 한과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대회를 계기로 수출이 확대된 이후 지금은 최고의 재료와 고가제품을 통한 고급화 전략으로 미국,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 터키 등에 수출하고 있다.

이처럼 신제품 개발과 생산 공정 자동화, 품질개선 등으로 지난 2007년 35억원이었던 매출이 2008년에는 41억원으로 약 18% 성장했다. 2009년은 44억원, 2013년은 49억원으로 증가해 2008년 이후 5년 동안 약 20%의 매출성장을 이뤄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화재 및 자동차 사고 위기 극복
지금의 포천공장으로 확장 이전한 후인 2001년에 원재료 창고에 큰 화재가 난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위기였다. 이 화재로 6억원 이상의 손실을 봤지만 직원들과 함께 단기간 내에 원재료 창고를 재건하고 한과 제조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제3차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2000년 10월) 만찬 디저트 선정을 목적으로 개최된 ‘한국전통식품 세계화를 위한 품평회’ 출품을 준비하던 때도 그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밤낮 없이 노력해 만든 작품을 가지고 이동하던 중 누적된 피로로 잠시 졸음운전을 하면서 자동차 충돌사고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사고 현장에서 급히 한과를 들고 나와 간신히 출품 접수를 하게 됐다. 그 작품은 한과부문 금상을 수상해 제3차 ASEM의 공식 디저트로 선정됐다.

“세계 26개 정상들에게 우리나라 한과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ASEM에 제공할 한과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ASEM 공식 디저트로 납품한 한과는 110만원 어치에 불과했지만 세계 26개 정상이 저의 한과를 먹었다는 점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죠.”

한과 대중화와 세계화에 열정 쏟아
그는 ‘세 살 입맛 여든 간다’는 신념으로 한과를 널리 알리고 세계적인 식품으로 만들기 위해 지난 2008년 30억원을 투자해 한과문화박물관과 교육관을 개관했다.

일반 성인, 청소년, 아동, 군인 등을 대상으로 한과 체험교육은 물론 미군부대 및 외국인 대상 한과체험 출장교육, 한과 전문인 양성교육, 선도농가와 농업고등학교 멘토링 교육, 한과문화페스티벌, 농업인 뉴웨이브 아카데미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포천을 한과 식(食)문화의 메카로 만들고 한과 인력양성은 물론 한과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 전통한과 홍보행사에 초청돼 한과를 소개하고 시연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후에도 꾸준하게 해외에서 열리는 음식페스티벌 등에 참여하고 세계 각국에서 초청을 받아 한과를 시연하고 있다.

“전 세계 50여 개국을 다녀봤는데 우리 한과가 최고의 과자(디저트)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세계적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관계자도 한과는 음식이 아닌 약이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한과를 알릴 기회만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갈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나라 문화원 등과 협력해 한과를 해외에 소개할 기회를 더욱 많이 만들고자 합니다. 이는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힘든 일입니다. 정부와 관련기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는 지난해 한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국의 전통과자’라는 책도 발간했다. 이 책을 영문 판으로 번역해 세계에 한과를 알리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다.

세계인의 취향과 기호에 맞게 그 나라와 민족이 좋아하는 한과의 맛, 모양, 빛깔, 품질 등을 연구하고 개발할 수 있는 한과세계화연구소와 한과 전문인을 양성하는 한과 마이스터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 김 대표의 꿈이다. 한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목표다.

지난해 7월에는 농림식품부로부터 한과협회 설립 허가를 받는 등 한과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향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한다”
그는 청소년, 소외계층 및 다문화가족 등에 한과를 기부하는 등 사회공헌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업현장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후배 기술인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합니다. 대충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쌀 한 가마니에 400만 톨의 쌀이 들어 있고 유과 한 개에 쌀 22톨이 사용된다는 것 등 세밀한 부분까지 연구할 정도로 미쳐야 합니다. 저는 길에 있는 돌이나 백화점에 진열된 제품 등 다양한 사물을 보면 모두 한과로만 보입니다. 한과에 미쳐 있는 것이죠. 청소 일이든 구두닦이든 어떤 일을 하던지 열정을 갖고 전문성과 기술력으로 승부하면 성공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