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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2016년 08월

선정호 : 114호

업종 : 제조업(철강)

주 생상품 : 열연/ 냉연간판, 후판, 철근 등

사업장 규모 :

회사주소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북부산업로 1480

홈페이지 : https://www.hyundai-steel.com/kr/index.hds

학력사항

홍성방송통신고(2016)


소속업체

현대제철주식회사 

특허 및 실용신안

- (특허) 1020140023348 / 용접용 작업대 / 공동
- (특허) 1020130062140 / 벨트 포설장치 / 공동
- (특허) 14894012 / 벨트교환장치(U.S.A) / 개인
- (특허) 138856604 / 벨트교환장치(E.P.O) / 개인
- (특허) 2913894 / 벨트교환장치(CANADA) / 개인
- (특허) 2013390707 / 벨트교환장치(AUSTRALIA) / 개인
- (특허) 2013800770768 / 벨트교환장치(CHINA) / 개인
- (특허) 1020110086653 / 관상제품용분리장치 / 개인
- (특허) 1020110063374 / 관상제품용분리장치) / 개인
- (특허) 1020110039390 / 멀티탭 보호장치 / 개인
- (특허) 1020110009047 / 용접용지그장치 / 개인
- (특허) 1020090057504 / 밴드 소잉 머신용 암 이송장치 / 개인
- (특허) 1020090046181 / 무정전 전원장치용 조립지그 / 개인
- (특허) 1020080105893 / 무정전 전웡장치의 정류부 / 개인 

주요경력

- ‘80.06.01 ~ ’85.10.01 / 조광기계 / 사원
- ‘87.05.01 ~ ’91.05.01 / 동아정밀 / 공장장
- ‘91.06.01 ~ ’95.01.01 / 천하정밀 / 개인사업
- ‘95.04.19 ~ ’04.09.30 / 한보철강 / 주임보
- ‘04.10.01 ~ 현재 / 현대제철 / 계장 

주요수상내역

- 한국신지식인(‘14)
- 우수사원(‘07)
- 현대제철철강상(‘11)
- 자주개선포상(‘11)
- 장기근속15년(‘10)
- 장기근속20년(‘15) 

소개

2016년 8월 이달의 기능한국인 수상자 현대제철주식회사의 김성규 계장은 국가품질명장이자 특허분야 신지식인으로 다양한 업무개선 활동과 정비작업 장비 개발 등을 통해 안정적인 조업지원과 원가절감, 품질향상을 실현하고 있는 숙련기술인이다.

김 계장은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좌절과 방황, 급기야 산업재해를 당하고 노숙생활까지 하는 등 시련을 겪다가 인생의 멘토 한 사람을 만나면서 지금까지도 기계기술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나누며 후배양성과 청소년 진로 멘토 역할에 힘을 쏟고 있다.

가난, 좌절, 방황, 노숙생활까지 혹독한 시련 끝에 기계기술 배워

지난 1962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김 계장은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당진중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취업을 해야 했다.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당진에 위치한 한 염색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지만 ‘방황’이라는 긴 터널로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 대부분이 여자직원인 염색공장에서 단순 생산 업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사춘기 시절이었던 그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주위에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나 선배와 후배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열등감을 갖게 됐고 이런 열등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죠. 결국에는 1년도 못 다니고 염색공장을 그만 두게 됐습니다.”

김 계장은 친구의 삼촌이 일하는 경기도 부천의 한 정화조 제조회사에 입사해 처음으로 타지에서 유압프레스로 압력을 가해 정화조를 만드는 일을 했다. 회사에 적응하고 성실함을 인정받을 즈음에 유압프레스에 왼쪽 손을 압착당하는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도 신경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회사에서 치료비는 고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회사는 부도 직전이었고 그 와중에 사고가 났던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회사들은 의료 및 산재보험 등을 가입하지 않은 회사가 많았어요.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치료비로 사용해야만 했고 밀린 월급도 받지 못했죠. 결국 회사도 부도가 나 손에 깁스를 한 채 회사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타지에 연고도 없었던 김 계장은 먹고 잘 곳이 없어 노숙을 시작했다. 1979년 16살의 나이로 공원, 지하철 등에서 1개월 정도 노숙생활을 했다. 그 당시에는 거지처럼 살아도 당진으로 다시 내려가는 것은 그 보다 더 싫었다. 유년기 및 사춘기 시절에 느꼈던 그 열등감과 초라함은 그가 지금 기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노숙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그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정화조 공장에서 함께 일을 했던 형님이 조그마한 공업사에서 일을 하도록 해준 것이다. 공구를 생산하는 조광기계라는 회사였다. 사실 기계기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에 조광기계에 입사한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먹고 자고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좋았기 때문이다.

손에는 깁스를 하고 있어서 청소부터 각종 허드렛일을 하면서 지냈다. 1980년에 입사해서 약 2년 동안 그의 업무는 변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도 제가 기술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또 그 당시에는 기술을 남에게 잘 알려주지 않았죠.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그 기술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죠. 월급이 제때 나오고 일도 힘들지 않아서 생활에 안주한 것도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월급도 밀리기 시작했다. 기술이 있는 동료 직원들은 월급이 밀리게 되자 퇴사를 하고 다른 곳으로 이직을 했다. 그는 이곳을 나가기가 두려웠다. 어린 나이에 사회란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월급은 줄었지만 사장과 남아 있는 직원들과 끈끈한 정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일했다. 처음에는 고급기술자 옆에서 보조로 일했지만 일손이 부족해 늦은 시간까지 선반, 가공 등을 배웠다. 이렇게 약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회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지나간 시간만큼 선반, 밀링, 열처리 등 대부분의 기계기술은 고급자는 아니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중급 정도의 수준까지 갖추게 됐다.

김 계장은 조광기계에서 나온 후 영등포 문래동에 위치한 동아정밀이라는 회사에 입사하게 됐는데 그 시기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기계기술인의 길을 걷게 해준 정신적 멘토였던 송종은 동아정밀 사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송종은 사장님은 사장과 직원의 관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해주셨고 기계기술의 전반적인 부분을 세밀하게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특히 중간 중간에 일을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 잡아주시고 지탱할 수 있게 해준 분이셨죠.”

하지만 잘 나가던 회사도 경영난에 인원을 감축하고 변두리 지역으로 이전을 해야만 했다. 그 당시 송종은 사장은 공장장이었던 그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기계기술을 배우고 일하면서 언젠가부터 한번쯤은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

김 계장은 선반을 직접 구입해 천하정밀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여러 곳에 납품하기 위해 새벽 첫 전철을 타고 일한 후 마지막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약 5년 동안 물품 제작부터 납품까지 쉬지 않고 노력했다. 하지만 납품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술자리를 해야 했고 일거리가 꾸준히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직장생활을 했을 때보다 더 힘들었고 경제적으로 더욱 더 악화됐다. 반복되는 술로 인해 건강상태도 나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로부터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의 채용소식을 접하게 됐다. 당진을 떠나온 지 약 18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당진으로 내려왔다. 한보철강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했지만 떨어졌다. 하지만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한보철강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1995년 4월 세 번의 도전 끝에 한보철강에 입사를 하게 됐다.

한보철강서 또 한 번의 시련 극복하고 자격증과 특허로 경쟁력 높여

한보철강에 입사한 이후 그야말로 그는 승승장구 했다. 설비관리팀에 배치돼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했고 업무부터 인간관계까지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고 동료 및 후배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다. 고급 선반기술과 친화력으로 입사 1년 만에 주임으로 승진했다.

안정적인 직장과 가정을 이루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게 행복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회사가 부도가 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났고 그 역시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힘들게 다시 찾아온 당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끝까지 남았다. 한보철강이 법정관리를 시작으로 2009년 지금의 현대제철에 인수되기까지는 약 12년이 걸렸다. 12년 동안 기술력과 성실함으로 버텨온 것이다.

“한보철강이 법정관리를 받고 있을 때 제가 결심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 어떤 시련이 찾아와도 나만의 경쟁력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죠. 아무리 회사가 힘들어도 이 분야에서만큼은 회사에서 나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격증을 취득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2000년 6월 선반기능사를 시작으로 2008년까지 밀링기능사, 연삭기능사, 지게차운전기능사, 보일러산업기사, 용접기능장 등 총 6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차례대로 취득하며 경쟁력을 높여갔다.

사내에서 분임조 활동을 통해 10건의 테마 해결 및 10건의 타부서 지도 실적을 보이는 한편 사내 직영 및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매월 1회 정기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현장개선 및 품질경영 정착을 위해 450건의 제안과 특허출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2009년 우수사원을 시작으로 매년 철강상, 자주개선 우수제안상, 분임조 우수상 등을 거머쥐었다. 2011년, 2012년 2년 연속 제안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벨트교환장치, 무정전 전원장치, 무정전 조립장치, 밴드 소잉 머신용 암 이송장치, 용접용 지그장치, 멀티탭 보호장치, 관상제품용 분리장치 등 총 14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상에서 하역한 철광석, 석탄 등의 원료를 고로‧제강‧소결‧코크스 공장에 공급하는 기계장치인 벨트컨베이어에 이상이 생기면 조업중지 및 감산 등 제철소 운영에 중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돌발 고장을 예방하고 안전하고 신속한 복구 작업을 위해 개발한 것이 벨트교환장치다. 1년간 소결, 고로, 코크스의 돌발 작업에 투입해 35시간의 조업 정지 시간 단축, 428시간의 계획 작업 단축 등의 성과를 이뤘다. 벨트교환장치의 현장 적용으로 연간 10억원 이상의 원가 절감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김 계장은 미국, 중국, 캐나다, 브라질에 특허를 출원해 원천기술을 선점함으로써 국가 경쟁력에도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장치는 제철소뿐만 아니라 대규모 광산, 시멘트 공장 등 벨트컨베이어 활용이 큰 산업분야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 계장은 이같이 꾸준한 업무개선 활동과 특허를 통해 안정적인 조업지원과 원가절감, 품질향상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3년 국가품질명장, 2014년엔 특허분야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특허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더 편하고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을 나름대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특허를 내보자는 생각에서 특허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허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기술과 경험 나누며 후배양성 열정 쏟아

자신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배움에 목말라 있다는 김 계장은 올해 홍성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조기(2년) 졸업하고 지금은 신성대학교 자동차학과(야간)에 재학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4년제 대학에도 진학해 공학도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부를 할 생각이다. 이와 함께 후배양성에도 더욱 힘쓸 계획이다.

그는 이미 자신이 가진 기술과 경험을 나누면서 후배 양성은 물론 취업준비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중·고등학교 학생과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Brand Power’, ‘인생에 변명하지 마라’ 등의 주제로 강의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중소기업협력재단 주관으로 중소기업 특수주조 뿌리기술부문 코칭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국가직무능력표준(NCS)에 참여해 중소기업 컨설팅도 하고 있다. 또 현대제철의 산학협력 학교인 합덕제철고등학교 학생들의 야간학습을 지도하고 있다.

이밖에 4개 봉사단체에 가입,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사랑 나눔 전국네트워크’에서 주관하는 청소년 진로 멘토링 협약을 맺고 청소년의 진로분야 진출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정년 전까지 숙련기술인의 정점인 대한민국명장 반열에 오르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정년 전까지 기본적인 정비기술과 돌발 상황발생 시 대응 요령 등을 체계적으로 담은 기계정비 매뉴얼을 계속 써나가고 있다.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라. 장인 정신이 없으면 안 돼”

김 계장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올리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취업을 하고 나면 어느 순간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정확히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지 빨리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위해 노력하세요. 숙련기술인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타이틀입니다. 장인과 같은 정신이 없으면 절대로 얻을 수 없어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기술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만의 ‘나’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