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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석
2011년 02월

선정호 : 50호

업종 : 전자기기

주 생상품 : 보안,영상장비(CCTV,출입통제,방송장비)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12명), 매출액(12억)

회사주소 : 전북 전주시 덕진구 전주천동로 422(진북동 1156-4)

홈페이지 : http://lineinfo.com/

학력사항

- 수원과학대학(’80)
- 군산공업고등학교(’76) 

소속업체

㈜라인인포 

특허 및 실용신안

- 특허 제10-0951827호 “차량번호 판독과 차량 통과 감지를 이용한 역주행 및 중앙선침범 차량 검출 시스템 및 방법”(단독)
- 특허 제10-0997808호 “신호위반 단속, 교통정보 수집 및 방범 기능을 통합한 교통 감시 시스템”(단독)
- 국제규격 ISO 인증: "통신장비, 폐쇄회로, 음향장비의 제조 및 부가서비스” 

주요경력

- ’76. 04. ~ ’86. 08. 금성전기(주) / 사원
- ’86. 09. ~ ’91. 09. 삼성전자(주) / 사원
- ’93. 01. ~ ’08. 02. 라인전자시스템 / 대표
- ’08. 03. ~ 현 재 (주)라인인포 / 대표이사
- ’07. 01. ~ 현 재 기능올림픽 전북동우회 / 회장 

주요수상내역

- 전라북도지사 표창(’10) “장애인의 기술 및 기능수준 향상 기여”
- 지식경제부장관 표창(’08) “이업종 교류 활성화를 통한 국가산업발전 기여


소개

“최근 우리사회는 더 이상 ‘기능’은 없고 ‘문화’만 남았습니다. 이런 현실이 기능인으로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난 몇 십년간 ‘기술’로 여기까지 왔는데 말이죠.”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한 ‘이달의 기능한국인’에 선정된 서암석(52) (주) 라인인포 대표는 “기능을 우대하는 사회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며 소감대신 우리 현실을 꼬집었다.

서암석 대표는 18년 동안 각종 통신장비와 구내 건물 통신 공사 등 전자시스템사업과 CCTV 등 정보통신 장비 개발 등에 주력하면서 자신의 회사를 전라도 지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 업체로 키워냈다.

서 대표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농사일을 거들며 전라도 군산에서 자랐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자 군산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가난했던 그는 성공하고 싶어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

“제가 8남매 중 막내였는데 늘 가정 형편이 안 좋았으니까 어릴 때부터 크면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호강시켜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악착같이 더 기술배우기에 매달렸단다. 그런 덕에 고등학교 3년간 특기생으로 장학금을 받았고 3학년 때는 지방기능경기대회 R/TV 수리직종에서 1등을 수상했다. 반신반의했던 터에 받은 이 상은 서 대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얼마 후 전국대회에도 나갔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등수 안에도 못 들었어요. 대회 나갔는데 떨려서 못하겠더라고요. 서울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첨단 기구 등 시설이 차이나는 곳에서 배운 저는 상대적으로 준비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다는 느낌을 받아 그때 아주 많이 속상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졸업 후 그는 오산에 있는 금성전기(주)에 취직했다. 면접 볼 때 느낌도 좋았지만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한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아 흐뭇했다. 무난하게 사회생활은 시작됐고 입사 후 바로 수원과학대학에 진학해 야간수업도 받았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과 미래 장기적인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였다. 10년 후 그는 삼성전자(주)로 자리를 옮겼다. 연구개발파트에 들어간 그는 광케이블 전송장비와 무선장비 연구개발 업무에 참여했다.

“회사 생활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광통신 하나 가지고 1,322명이 동시에 통화할 수 있는 전송 장치를 개발하고 무선 호출기와 휴대폰 개발에 참여해 사람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으니 쾌감이 느껴지더군요. 연구개발 업무가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그러던 중 전라북도 전주에 영업소가 생겨 서암석 대표가 적임자로 뽑혀 발령을 받았다. 창고관리부터 직원관리, 기술, 영업까지 모두 도맡아야했다. 매출압박도 심했다.

“기술만 뛰어났지, 어음이 뭔지도 잘 몰랐는데 그런 제가 이를 제대로 운영하려니 역부족이었습니다. 영업도 너무 힘들었고요. 그래서 사표를 내고 차라리 이참에 내 사업을 하자고 결심했죠.”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 대표는 기술 영업을 하겠다는 목표로 자그마한 회사를 차렸다. 퇴직금을 털고 형제들에게 작은 도움을 받아 2,000만원으로 시작했다. 그를 포함해 직원은 3명이었다. 각각 1인 5역씩 하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밤샘이었다.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자금융통이었다. 어떤 때는 일을 끝낸 지 1년이 넘어서 수금이 될 때도 있었다. 미수금도 적지 않았다.

“자금 회전이 안 돼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여윳돈이 없었으니까요. 아내가 묵묵히 기다려줘서 버텼지 안 그랬으면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위기도 있었다. 사업한지 4년 만에 백화점 공사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그 백화점 건물주가 부도가 났다. 채권단을 형성해 1억 가운데 겨우 4,000만원 만 챙길 수 있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영업기술도 사업수완도 생겼고요.”

사업은 ’95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사업 아이템을 바꾼 것이었다. 정보통신 보안장비로 바꾸면서 부가가치가 높아졌고 이는 성공적인 아이템 발굴이었다. IMF때문에 모두가 힘들 때 그는 호황을 누렸다.

“금융업계에 금융사고가 늘면서 농협, 새마을 금고 등에서 CCTV설치를 원했어요. 손이 모자라 못할 정도로 일이 몰리면서 흑자를 봤죠.”

KT농촌정보통신 현대화 시설 사업 등 굵직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서암석 대표는 18년 만에 103평 규모의 지하1층 지상3층 사옥을 지었고 가족이 살만한 아파트도 한 채 샀다. 고객 한 명 한 명에 정성을 쏟아 일궈온 결실이었다.

“초기 10년 정도는 월말만 되면 직원들 급여 때문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금은 계획대로 자금이 움직이니까 자금압박은 없죠. 아주 큰 발전이죠? 하하”

요즘 그의 애틋한 바람은 운영회사가 동종업계에서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직원들 복지와 차별화된 기술 아이템 발굴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사업은 제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게 참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람도 배로 느끼고요. 계속 고민하면서 열심히 앞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서암석 대표는 지난 ’89년부터 기능동우회에 참여 총무와 회장을 역임하며 농촌지역과 재난지역, 불우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기능인 육성에도 힘쓰고 있다.

“기능인들의 기를 살려주시고 대우도 잘 해주십시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기술자의 길을 간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많이 두려워합니다. 아무도 기능을 하기 싫어한다면 우리나라에서 해야 하는 기술은 앞으로 누가할 것인지 그게 더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