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능한국인 안내

기능한국인 리스트

박종안
2011년 03월

선정호 : 51호

업종 : 기계

주 생상품 : 산업용 로봇제작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50명), 매출액(154억), 수출액 (26.6억)

회사주소 :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천동 661번지

홈페이지 : http://www.sindok.co.kr/

학력사항

- 영남대학교 기계공학과(’85)
- 경북공업고등학교 기계과(’73) 

소속업체

신독엔지니어링(주)

특허 및 실용신안

- 특허 (단독 2건)
 제0431281호 “환편기의 실린더 캠홀더 제조방법”

- 실용신안(단독 2건)
 제0204570호 “자동차 판넬 어셈블리 제조용 지그의 교환장치”
 제0206308호 “환편기의 서브롤러 어셈블리” 

주요경력

- ’73. 05. ~ ’76. 04. (주)코오롱 / 사원
- ’79. 02. ~ ’92. 01. 금오공업고등학교·대중금속공업고등학교 / 교사
- ’92. 01. ~ 현 재 신독엔지니어링(주) / 대표이사 

주요수상내역

- 산업자원부장관표창 “우수자본재개발 공로” (’04)
- 지경부장관표창 “중소기업발전공로”(’08)
- 산업포장 “우수자본재개발 공로” (’10) 

소개

“저는 밤샘 인생입니다. 어릴 적엔 우유배달, 아이스크림 장사, 신문배달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고용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은 박종안 신독엔지니어링(주) 대표를 이 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대구 달서구 대천동에 위치한 신독엔지니어링(주)는 한국 자동차 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1992년 창업하여 강한 응집력을 바탕으로 자동차 차체 로봇용접 자동화 시스템 등 초우량 기술을 일궜고 2010년 우수 자본재개발 유공자 포상’에서 한국 자동차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산업포장 수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대구 출신의 박종안 대표는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박 대표는 공사장 감독 일을 하던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 때부터 도로 정비하는 일을 어깨 너머로 배웠고 이 대가로 구호품배급표를 받아 강냉이 죽과 밀가루 등으로 바꾸어 식구들과 끼니를 때웠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뜨거운 여름날에는 아이스크림 박스를 매고 골목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아야했다.

“그땐 어린 나이에 그게 어찌나 창피하고 싫던지 친구들이 많은 골목에서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서서야 아이스크림 사라고 소리치곤 했어요.”

중학교 땐 새벽 3시30분부터 3시간동안 대구 전체, 왕복 20킬로를 돌며 신문 배달을 했고 학교가 파한 후에는 다른 석간신문을 돌려 밤 10시나 돼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생활을 3년이나 했다. 잠도 부족하고 하루 6시간 이상 신문배달을 해야 했던 박 대표는 학교만 가면 파김치가 돼 수업시간에도 졸기 일쑤였다. 중학교 입학 당시 전교 1등 이었던 그의 성적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졸업 즈음 박 대표는 공고 진학으로 마음을 굳혔다. 대구에서 일류 공고였던 대구 공고에 낙방한 그는 경북공고에 들어갔다.

“그냥 담담했어요.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충격적이지도 않았고 그저 제 상황을 받아들였어요. 기술을 배워 나의 일은 내 스스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공고에 다니면서도 생계를 위한 돈을 벌어야 했다. 이번엔 우유 배달을 선택했다.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대구 시내를 돌며 우유배달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첫 시험의 결과는 112명 가운데 109등 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술을 배우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공고 분위기나 환경도 안 좋았고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첫 성적표에 충격을 받은 박 대표는 다시 다른 결정을 내려야했다. 당시 선생님의 권유로 학비가 면제되는 기능훈련생이 되기로 한 그는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기능훈련에 매진했다. 박 대표는 자정이 넘도록 기계를 배우며 실습을 했고 2학년 때 대구 경북 기능대회에 출전해 선반 직종에서 2위를 했다.

“물론 금메달을 못 따 아쉬웠죠. 대부분은 3학년 때 이 대회에 출전하는데 저는 2학년 때 출전을 하게 되는 바람에 연습량, 경험들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기 때문에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작은 기계회사에 취직을 했고 그곳에서 일을 배우면서 모집공고가 난 코오롱에 지원했다. 단 3명을 뽑는 데 100여명이 몰렸지만 박 대표는 보기 좋게 합격했다. 열심히 한 덕에 3년차에는 「코오롱 생산성 대상」도 수상했다. 군입대를 해야 했던 박 대표는 당시 휴직 제도가 없어 퇴사를 하고 1976년 입대를 했다.

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둘째형이 면회를 와서 뜻밖의 얘기를 건넸다. 학비를 대줄테니 대학에 진학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는 안 그래도 제대를 앞둔 시점이라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차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형들도 고생을 했지만 그때쯤 각자의 길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중이었고 막내인 동생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즈음하여 박 대표를 신임했던 모교 은사님으로부터 취직 제안도 받았다. 공고 실습 교사 자리였다. 그렇게 잠시 실습교사 생활을 하다가 영남대학교 기계공학과에서 만학의 길을 걷게 된다.

“다른 건 다 괜찮았고 자신 있었는데 수학이 참 어려웠어요. 공과대학에서 수학의 비중이 큰데 말이죠. 기본이 없으니 미적분 방정식 등을 이해하고 다시 공부하는데 애 많이 먹었습니다. 밤샘도 엄청 많이 했고요. 고생 끝에 16학점 이수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대학 졸업 직후 운 좋게 자리가 나 실기교사 처지에서 벗어나 대중금속공고에서 정교사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후 10년간 열심히 교직생활을 했다. 그토록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보내며 체득한 그의 바지런함은 학교에서 기능훈련반을 맡으면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젊은 교사의 열정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보낸 선배의 마음으로, 휴일 없이 밤낮 없이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이들을 지도했다. 공고 학생들에게 자격증이 절실했던 그때, 100%에 육박하는 자격 취득률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안정적 이기만한, 평생직장이라 할 만한 교사직을 과감히 그만두게 된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 회의가 들거나 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제 몸에 녹아있던 기술을 직접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대학에서 배운 지식, 교사로서의 경험 등을 더하면 뭔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인정받는 교사였고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기능에 대한 열정과 자신이 받은 도움을 지역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기능을 익힌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자신이 그렇게 어려웠던 학창시절을 헤쳐 왔기에 할 수 있던 생각이었다. 처음엔 주위의 반대도 있었으나 평소 그를 지켜보던 동료 교사 등 지인들은 그의 뜻에 공감하고 응원해 주었다. 특히 큰형님은 선뜻 거금을 투자해 주실 만큼 그에게 믿음을 보여주셨다.

“제 귀가 커서 주변의 조언을 잘 듣는 편이거든요. 주변 분들의 격려가 도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형님이 빌려준 2,000만원으로 직원 2명과 시작된 기계부품제작 사업은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거의 매일 이어지는 밤샘작업이었지만 조금씩 키워가면서 보람을 느꼈다. 처음에는 기계부품만 하다가 치공구분야, 자동화설비 제조업으로까지 넓혀갔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해왔다. 신독엔지니어링(주)는 자동차 차체용접의 자동화 설비 전문생산업체로 현대, 기아, 르노삼성, 말레이시아 플로톤 등과 거래하고 있다. 박 대표는 자동차 차체용접의 자동화 설비 생산에 필요한 설계 속도와 용량을 증가시키고자 일찍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보강하는 설비 투자에 힘썼고 그 결과 각종 자동차 부품을 정해진 위치에 맞춰 조립하고 용접하는 로봇용접 자동화 설비인 ‘로봇웰딩 FA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완성차 전반의 품질향상은 물론 일본 등으로부터의 자본재 수입을 대체하는 효과를 내 자동차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향상에 기여했다.

“자금을 무리하게 융통하지 않는다는 게 제 경영 철칙입니다. 아무리 구멍가게를 경영한다 해도 기본 경영룰이 확실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려울 일도 별로 없죠. 무리하질 않으니까요.”

그럼 중소기업을 경영하며 무엇이 박 대표를 제일 힘들게 할지 궁금했다.

“사람,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갈 땝니다. 사람이 올 때는 늘 기분 좋지만 그들이 내 곁을 떠날 때, 그때는 참 가슴이 쓰립니다. 아직도 그게 제일 저를 힘들게 하고 슬프게 만듭니다.”

자동차 1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약 6천5백회 이상의 용접이 필요한데 이러한 작업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될 수가 없기에 여기에 로봇이 투입된다. 그는 기술 연구소에 매년 10억이 넘는 연구개발비를 투자해 차체 완성차 조립라인의 핵심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 기술개발 제품의 해외 판로를 개척해 중국과 인도, 러시아, 브라질, 멕시코 등 신흥 자동차 공업 국가로의 수출도 도모하고 있다.
박종안 대표는 기업의 성장과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소홀하지 않는다. 소속 직원들이 지방 및 전국기능경기대회에 참가하도록 후원해 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기능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민들레 장애인문인협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지원하는 등 기술․인간존중의 경영이념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이업종중앙회 법제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기업과 기업인의 교류 촉진사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박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기능과 기술에 대한 바람을, 자신의 사명인듯 피력했다.

“기능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소외되어 있습니다. 저는 기능·기술인을 다른 직종과 나란히 세우고 싶습니다. 특별대우는 아니더라도 말이죠. 우리는 기능과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한 나라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