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능한국인 안내

기능한국인 리스트

이명재
2011년 07월

선정호 : 55호

업종 : 데이터복원

주 생상품 : 데이터복구, LCD수리, SSD, 저장장치판매, 기술서비스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250명), 매출액(268억), 수출액(310만불)

회사주소 : 충북 청원군 오창읍 각리 644-5번지

홈페이지 : http://www.myung.co.kr/index.do?retRef=Y&source=http://www.koreanmaster.kr/

학력사항

- 금오공업고등학교('76)


소속업체

㈜명정보기술

특허 및 실용신안

- 특허 (단독 2건, 공동3건)
 제10-0779114호 "스카시 인터페이스 변환 기술을 적용한 하드디스크 다중테스트 장치" 제10-0770732호
 "플래시 메모리를 이용한 IDE 및 SCSI 방식의 데이터 저장장치" 제10-0982440호 "단일 플래시 메모리의 데이터 관리시스템"(공동)
 제10-0957224호 "SSD에서 다중데이터 채널을 이용한 플래시 메모리의 제어방법 및 제어시스템"(공동)
 제10-0933286호 "데이터복구를 위한 단일 하드디스크의 스핀들 모터 교체장치"(공동)

- ISO9001:2000 품질경영기업 인증


주요경력

- '83. 2. ~ '90. 6. AMK / 과장
- '90. 7. ~ 현 재 (주)명정보기술 / 대표이사


주요수상내역

- 국무총리 표창('06) "정보화 유공"
- 충청북도지사 표창('06) "수출 유공" 

소개

"향후 10년 안에 강소 기업, 히든 챔피언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어갈 주역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변화속에서 기술,기능 분야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

기초 기술의 육성과 기능 엘리트주의가 향후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버팀목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말문을 연 (주)명정보기술 이명재 대표. 데이터 복구 분야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 (주)명정보기술 이명재 대표를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이 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기능인으로서 강한 자부심과 국내 데이터 복구 분야의 개척자로서 사명감을 함께 가진 이명재 대표. 사실 이명재 대표의 어린 시절을 보면 현재의 기능인 이명재를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1등을 놓쳐 본적이 없었습니다. 공부를 곧잘 했기 때문에 판검사 되란 이야기만 많이 들었지 기술, 기능이 뭔지 알 기회도 없었던 시절이었죠."

1957년, 충청북도 괴산에서 8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난 이명재 대표는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를 잘해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의 기치 하에 기능 강국을 위한 전문 교육 기관 육성정책으로 금오공업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무상교육, 기숙사 제공, 일본 유학 기회라는 특전을 내세웠던 금오공업고등학교는 학교장 추천으로 선발하였으며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이명재 대표 또한 학교장 추천으로 입학을 결정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이 중학교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의 영예로 살아 온 순박한 시골 소년의 인생에서 첫 꼴찌 타이틀과 방황을 안겨줬었습니다"

금오공업고등학교에서 이 대표의 사춘기 시절은 혹독하기만 했다. 17살 어린 나이에 첫 기숙사 생활은 낯설기만 했으며 기능이 뭔지도 모르고 자란 이 대표에게 작업복 차림의 첫 실습은 그가 상상했던 수업과 너무 달랐다.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할 줄 알았던 순박한 시골 소년은 현실 도피로 바둑에 심취하게 된다.

또한 이 대표는 시 습작시집 2권을 낼 정도로 문학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공부 외 분야에 관심을 가질수록 그의 성적은 곤두박질 쳤고 특히 기술 과목에서의 낙제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감수성 예민한 10대 소년에게는 기술, 기능보다 특별한 뭔가를 위한 갈망이 컸으며 이는 기술 자격증 획득을 거부하기에 이르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기술 자격증이 없는 특이한 이력을 남기게 된다.

졸업 후 일본 유학의 특전은 군사정권 하에서 졸업생 전원 하사관 임용으로 정책이 바뀌면서 이 대표에게 기능인으로서 운명적 전환점을 맞게 한다.

"레이더 정비 하사관으로 5년간 군복무하면서 최첨단의 병기를 정비, 수리하는 업무를 주도적으로 맡았습니다. 대대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었죠. 바로 금오공업고등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배운 이론과 실습들이 현장에서 응용되면서 기능인의 첫 발을 수월하게 내딛게 했던 것 같습니다. 한때는 방황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기능은 제 몸 속에 조금씩 배어 있었나 봅니다."

게다가 미사일 기술 매뉴얼이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군과 같이 작업하는 기회가 반복되면서 이명재 대표는 영어 또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그리고 1983년 미국계 다국적 회사 AMK(Applied Magnetics Korea)에 생산직 사원으로 입사하게 된다. 당시 AMK는 컴퓨터 하드디스크 헤드 생산 분야에서 세계 시장 넘버원으로서 청주에 7,000명 규모의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었다. AMK 생산직 직원으로 3년간 근무하면서 그는 컴퓨터 헤드의 제조, 품질 관리 등에 대해 좀 더 폭 넓고 깊은 지식을 쌓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이 참고 서적으로 보던 기술 책자들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생산직 직원은 보통 열람할 일이 없는 회사 내부 매뉴얼 관련 자료를 직접 손으로 베껴 쓰면서 컴퓨터 하드디스크 관련 기술을 독학으로 익히게 된다.

"캐비닛 2개 분량의 많은 영어 자료들을 직접 손으로 노트에 베껴 쓰면서도,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몰랐던 새로운 기술, 컴퓨터 응용 이론을 알게 된다는 기쁨으로 흥분하던 나날이었습니다."

생산직 직원은 한계가 있다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공부하며 맡은 일에서는 1등을 하고야 마는 자존심 강했던 이 대표. 그는 출하 전의 하드 디스크 헤드를 최종 테스트하는 수리, 관리 부서인 M.R 부서로 발령을 받으며 드디어 첫 기회를 맞게 된다.

고장이 나면 바로 일본으로 수리를 보냈던 AMK 회장의 컴퓨터를 그가 고치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1년 마다 진급하는 초고속 승진 기록을 갖게 된다. 아울러 생산만 전담하던 회사에 한국 내 마그네틱 헤드 수리라는 새로운 사업 영역을 제안하면서 컴퓨터 하드 디스크 수리 및 기술 영업의 총괄 책임자로 업무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에게 또 한번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다.

"사실 저는 창업이나 사업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국적 기업인 AMK가 한국 내 높아진 인건비를 이유로 결국 한국 시장 철수를 결정하게 되면서 AMK에서 쌓은 기술과 영업망, 고객까지 그대로 갖고 나오게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 (주)명정보기술를 설립하게 된 배경입니다 ".

디지털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회사 설립 당시 데이터 복구 시장은 국내에서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분야로 (주)명정보기술이 1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국내에 축적된 노하우는 전무했다.

그래서 이 대표는 데이터 복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한 미국을 수차례 방문하며 발로 뛰어 기술을 습득하기에 이른다. 기술을 가졌다고 조금만 소문이 난 회사는 모두 방문했으며, 데이터 복구 전문가가 있다고 하면 직접 만나서 몇 박 며칠을 붙어 앉아 배움을 청했다. 컴퓨터 하드 디스크 및 데이터 복구 관련 전시회는 한군데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이런 그의 노력과 끈기로 하드 디스크 수리 및 데이터 복구 분야의 독보적 1인자로 회사를 탄탄히 키워갈 수 있었다.

1999년 (주)명정보기술에게 유명세를 타게 한 CIH바이러스 대란은 회사의 위상을 높여준 계기도 됐으나 반면에 데이터 복구 분야의 경쟁자들을 양상하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국가적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주)명정보기술의 활약상은 더욱 커져만 갔다.

대표적으로 2010년 링스헬기 추락 사고 시, 헬기에 내장된 하드디스크를 복원해 원인 규명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온 국민을 경악과 슬픔으로 몰고 갔던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45일간 바다 속 염분에, 그것도 바다 뻘속에 잠겨 있던 하드 디스크를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복구를 위해 전담팀을 구성해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기에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0일 동안 밤새워 작업한 결과 운 좋게 하드디스크 복원이라는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

현재 (주)명정보기술은 연매출 268억에, 수출액 310만불, 종업원수 250명을 갖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현재 "플래시 메모리를 이용한 IDE 및 SCSI 방식의 데이터 저장장치" 등 8건의 특허를 보유(이명재 사장 발명 5건)하고 있으며 복구 소프트웨어 명스텔라 상품화, 데이터 백업 솔루션 이미지 드림 개발, 영구삭제프로그램 디스크이레이져 개발, 일체형 USB 복구 툴 개발 등 연구 개발을 통한 기술력을 확보해가고 있다.

그 중 차세대 저장 장치로 각광받고 있는 SSD를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 지난 2004년 업계에서 처음으로 상용화해 제품을 출시했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2006년에 진출한 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앞선 셈이다.

여기에 SSD는 복구할 수 없다는 기존 관념을 깨고 복구기술도 자체 개발해 통신, 제철, 자동차 등 산업용 분야를 타깃으로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밖에 (주)명정보기술은 2001년부터 경찰청 사이버수사대를 비롯, 대검찰청, 국가정보원 등 공안기관에 데이터 복구 기술 이전과 보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수사 능력의 세계적 수준 향상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20년 컴퓨터 명가인 (주)명정보기술이 쌓아온 우수한 기술력과 이명재 대표의 안목, 인력 양성의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대표는 미국의 온트랙, 유럽의 이바스와 같은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데이터 복구 기술 수출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본, 인도, 말레이시아, 태국, 이란 등에 기술 수출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韓-佛-日을 잇는 데이터복구 협력체(명얼라이언스) 구축을 통해 데이터 복구 분야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고 있다.

"컴퓨터 관련 기초 기술이 없는 우리나라가 지금은 세계 TOP은 아니지만 응용 분야에 있어서는 세계적 수준임을 자부합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최근 대지진 발생 후 데이터 복구에 대한 니즈(needs)가 높아져 일본 쪽으로의 기술 수출이 크게 증가된 상황입니다. 이는 국내 데이터 복구 기술이 아시아 최고 수준임을 입증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죠."

사업을 하면서 누구나 겪는 부침(浮沈)이 20여년 동안 사업을 해오고 있는 이 대표에게는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사실 하드디스크 수리, 데이터 복구 분야에서는 많은 투자가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 위기라고 얘기할 정도로 어려웠던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위기라는 마음가짐으로 위기 관리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해오면서 위기를 최소화해 온 것이 큰 위기 없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오창과학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이기도 한 이명재 대표는 오창을 대한민국의 실리콘벨리로 만드는 초석을 다지는데 온 힘을 다할 것임을 결의 있는 표정으로 밝힌다

긍정적 사고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력, 적극적인 생활 태도를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다는 이명재 대표는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장애인 고용 확대 및 지역 내 소외 이웃에 지속적 컴퓨터 지원을 통한 정보 격차 해소는 물론 '데이터 복구 사례집'을 출간해 무료 배포함으로써 정보화 지식 전파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

또한 중소기업 경영인으로서, 기능인 출신으로서 기능과 기능인의 중요성, 발전 가능성에 대하여 역설한다.

"기능인의 길이 당장 화려하고 근사해 보이진 않겠지만 앞으로 다양화 될 세상에서 간판보다는 자신만의 기능과 기술이 경쟁력이 될 겁니다. 열정과 노력을 더 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여기에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다면 훌륭한 경영자로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