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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순
2012년 02월

선정호 : 62호

업종 : 금형

주 생상품 : 발포금형 및 전용설비 다이캐스팅 주조 부품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38명), 매출액(280억) [(주)동양금속] 근로자수(20명), 매출액(41억) [지상정밀(주)]

회사주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오선동 273-72

홈페이지 : http://www.jisangbiz.com/

학력사항

중앙직업훈련원(‘82) [현 한국폴리텍Ⅱ대학]
삼성경영기술대학(’93) 

소속업체

지상정밀㈜ 

㈜동양금속 

특허 및 실용신안

- 실용신안
제20-0396637호 “링크타입 내면지지장치”
제20-0396638호 “가변형 내면지지장치”
제20-0402100호 “블라인드 리벳”
제20-0455008호 “냉장고 도어판넬 가스켓 코너 삽입부의 언더컷 형성이 가능한 진공성형장치”
- ISO9001, ISO14001 "금형, 지그, 자동화설비, 목업의 설계, 개발, 생산 및 부가서비스 

주요경력

- ’82. 04. ~ ‘84. 06. 영진금속공업사 / 사원
- ’84. 07. ~ ‘98. 09. 삼성전자(주) / 과장
- ‘99. 06. ~ 현 재 지상정밀(주) / 대표이사
- ‘07. 10. ~ 현 재 (주)동양금속 / 대표이사 

주요수상내역

- 금형기술사 (‘95)
- 컴퓨터응용가공산업기사 (‘81)


소개

“앞으로도 계속 뽑을 겁니다. 기술하나로 정년 없는 제조회사를 만드는 것이 제 꿈이니까요. 기술 하나 제대로 익혀서 정년 없는 내 일터를 일궜으니 이제 다른 기술자들도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광주광역시에서 지상정밀(주)와 (주)동양금속 두 개의 금형제조회사를 운영하는 박정순 대표의 첫마디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예순두 번째 이 달의 기능한국인으로 박정순 대표를 선정했다. 수학만큼은 고등학교 때까지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던 시골소년 박정순은 이제 두 개의 제조회사, 약 6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사장님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두 회사에서는 예순이 넘은 직원을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앞으로도 계속 뽑을 계획이란다.

박정순 대표는 충청남도 논산출신이다. 5남1녀의 넷째로 태어난 그는 논산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전라남도 고흥으로 이사를 갔다. 고흥의 작은 마을 녹동에서 떡방앗간을 차린 아버지를 도와 4학년 때부터 공동우물에서 물 나르기 등 허드렛일로 시작한 그의 작업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갔고 중학교 때는 떡 만드는 기술까지도 익혔다. 공부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일 때문에 학교를 빠져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인문계 녹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박 씨는 국비로 운영되는 중앙직업훈련원에 형의 뒤를 이어 입학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우니까 차선책으로 중앙직업훈련원에 지원했고 그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나마도 고마운 일이었죠. 워낙 밥 먹고 사는 게 절실할 때라 …
자동차나 가전제품 같은 모든 공산품에 금형은 무조건 필요하겠구나 싶어‘금형학과’에 지원했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그 판단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인생은 '금형기술‘을 만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인문계 출신이다 보니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기초지식이 없었던 그는 초기엔 애를 먹었다. 설명을 들어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6개월간 이를 악물고 매달렸다. 차차 흥미가 붙었고 성적이 잘나오니 재미도 붙었다. 2년을 매진하니 졸업 때 과 수석을 하는 영광도 누렸다. 그러나 제대 후 취업은 녹록치가 않았다. 학교생활과는 또 달랐다. 방앗간 일을 돕던 그는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셋째 형이 있던 인천 부평으로 와 본격적으로 직장 구하기에 나섰다. 이력서를 들고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도 거르며 구로공단과 인천공단을 돌며 입사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세 달이 지나도 어느 한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노동부에서 운영하는 부천 직업 안정소에 찾아갔다. 상담사와 상담 끝에 경력 3년차 금형 담당자를 구하는 소기업이 하나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그는 그 회사로 무작정 찾아갔다. 부천에 있는 15명 규모의 자그마한 공장이었다.

“사장님과 면담할 기회를 달라고 사정한 끝에 기회가 왔어요. 그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뭐라도 할 각오가 돼 있었습니다. 40분정도 사장과의 면담 끝에 가까스로 운이 좋게 취직이 됐죠.”

‘내일부터 나오라’는 사장의 지시를 받고 밖으로 나오니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눈가에는 뜨거운 물줄기가 하염없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 감동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뜨거운 감동, 그건 어떻게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아직도 그때의 진한 감동이 가슴속에 꽉 메워지는 지, 박 대표는 한동안 말이 없다.

당시 대우전자 협력사 가운데 하나였던 영진금속공업사, 그곳이 바로 그가 눈물겹게 얻은 첫 직장이었다. 사장님께 고마운 마음도 있고 힘들게 들어간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그는 여기서 밀링, 선반, 연삭 등 여러 가지 기초 가공기술과 금형실무 경험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엔 삼성전자 경력자 특채시험에 합격한다. 1984년,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더 큰 곳에서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커질 무렵이었어요. 작은 회사는 여러 가지 일을 배울 수 있지만 아무래도 여건상 배우는데 있어 한계는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셈이죠. 모든 것이 감사했습니다.”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냉장고와 세탁기, 전자렌지를 제조하기위한 도구인 금형을 만드는 업무를 맡게 됐다. 성실하게 일하며 일본어를 독학하여 삼성그룹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연수 기회도 잡아 3개월간 일본 현지에서 기술도 익히며 기술 전반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그즈음 신문의 경제면을 매일 정독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공부하며 세계 경제가 돌아가는 소리를 읽었다. 그럴수록 도전과 일에 대한 욕심은 커져만 갔다.

박정순 대표는 93년, 삼성전자 내에서 운영하는 삼성경영기술대학에 입학한다. 메카트록닉스학과를 야학으로 수석 졸업한 후 내친김에 동 대학원도 졸업했다. 그 후 연수부 교육팀에 파견돼 1년간 직원교육도 담당했고 그 후 광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내려오자마자 IMF가 터져 구조조정으로 직원들은 연거푸 퇴사를 하게 됐다. 그때 박정순 대표도 결정한다. ‘기술하나로 정년이 없는 내 일터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같이 퇴사한 선배와 자본금 5,000만원으로 어설프게 시작한 사업은 10개월 만에 조용히 문을 닫았다. IMF탓에 일거리 자체가 없었고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사회를 너무 몰랐고 경영에도 너무 무지했죠. 시장의 흐름도 파악하지 않고 덜컥 준비도 없이 그냥 막무가내로 시작한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그 얼마 후, 삼성전자 협력사를 운영해볼 생각이 없냐는 선배의 제안이 들어왔다. 90평 규모의 금형부품 제조 공장이었다. 이번엔 꼼꼼하게 따졌고 시장조사도 했다. 치밀한 준비 끝에 인수를 하기로 했다. 자본금 5,000만원의 두 번째 도전이었다. 그게 '99년, 지상정밀(주)의 시작이다.
회사가 자리를 잡자 냉장고의 냉열기가 빠지지 않도록 하기위해 밀폐기술이 중요한데 이를 위한 냉장고 도어판넬 가스켓 코너 진공성형장치 등 중요한 부품도 개발하며 연구에도 박차를 가했다. 백색가전용 금형, 자동화기기 생산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지상정밀(주)은 이 분야의 강소기업으로 성장해나갔다.

박 대표는 지상정밀(주)이 본격적인 괘도에 오르자 ’07년에는 삼성전자 가전제품의 양산부품 공급을 목적으로 세탁기 ․ 냉장고 부품제조 전문업체인 (주)동양금속을 창업했다. 삼성전자의 가전제품 부품을 안정적으로 공급가능한 회사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지상정밀(주)은 금형제작의 원천기술 개발과 사용자 지원을 위주로 한 엔지니어링 회사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고 (주)동양금속은 창업 4년 만에 280억이라는, 첫 해 매출 4배에 가까운 매출신장세를 기록했다.

“안주하지 않고 배움의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온 것이 도전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습니다. 운도 좋았고요. 요즘은 기능인 후진양성을 위한 강의도 가끔 하는 데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나누는 즐거움이 참 큽니다. 이제 제가 가진 기술과 기능으로 앞으로 많은 이들에게 작게나마 베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