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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식
2012년 06월

선정호 : 66호

업종 : 조선

주 생상품 : 선박용 Module Unit 제품 생산

사업장 규모 : 근로자수(800명), 매출액(1,800억)

회사주소 :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517-2

홈페이지 : http://www.sunboind.co.kr/

학력사항

부산대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09. 12)
국립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71) 

소속업체

선보공업㈜ 

특허 및 실용신안

2008. 10 “열변형을 고려한 스턴튜브 부시유니트 및 그 설치방법”
2008. 10 “스턴튜브 부시유니트 및 그 설치 방법”
2009. 03 “선박용 유체 여과 필터”
2009. 09 “스턴튜브 부시유니트 및 그 설치방법”
2009. 10 “JIS 타입의 선박용 스트레이너”
2009. 10 “선박용 유체 여과 필터”
2009. 11 “선박용 밸러스트 수 전처리 필터 및 그 처리 방법”
2010. 01 “스턴튜브 부시유니트”
2011. 06 “선박용 유체 필터”


주요경력

- ’76. ~ ‘80. 현대중공업(주) 기장 생산부
- ‘80. ~ ’86 대우중공업(주) 기관의장부
- ’86. 08 ~ ‘01. 11 (주)남영공업 설립 / 대표이사
- ‘96. 07 ~ 현재 선보공업(주) 설립 / 대표이사
- ‘10. 01 ~ 현재 부산 해양산업육성 조선분과 / 위원장 

주요수상내역

-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03)
- 납세자의 날 산업포장 (’04)
- 대중소기업 협력대상 산업자원부장관상 (’06)
- 부산시 봉사대상 (’07)
- 무역의 날 ‘수출 5천만불 탑’ 수상 (’09)
- 제 28회 부산 산업대상(근로복지부문) (‘10) 

소개

“미래를 대비하는 자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정신을 갖고,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도전해야 하는 부분은 해양플랜트 산업 부분입니다. 지금 조선 기자재 부분은 이미 눈부신 발전을 해 왔고, 지금 가지고 있는 기술력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 가능성은 높습니다. 그런데 왜 해양플랜트 산업 분야에 눈을 돌리냐고요? 새로운 도전정신을 가지고 미래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 선보공업(주) 직원들도 신이 나서 일을 하겠죠, 미래를 향해 늘 안주 하지 않을 때 발전이 있다고 믿습니다.”
항상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자.
부산광역시에 본사를 둔 조선 기자재 제작 기업 선보공업(주) 최금식 대표의 경영 철학은 “항상 생각하며 최선을 다 하자”이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예순 여섯 번째 이 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최금식 대표를 선정했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 착안에 도전했고, 결국 도전의 결실을 얻기 위한 생각과 성실함을 가지고 있던 최금식 대표는 이제 부산공장과, 전남 공장, 자회사인 선보유니텍, 선보 하이텍 등 약 800여명의 직원과 매출 1800억 원에 달하는 중견기업의 기능인 출신 CEO다.

호텔 배관공의 삶은, 나의 원대한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제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 했던 최 대표는 졸업 이전에 한 호텔의 배관과로 배정을 받아 취업에 성공 했다. 취업을 하고 나서 최 대표가 생각 하게 된 것은, “여기서 내가 배관기사로 안주한다면, 더 이상 높은 꿈을 가질 수 없겠구나.” 이었다고 한다. 호텔의 배관 기사 일은 단순했고, 그 일이 최 대표가 생각 하는 이상적인 삶의 목표가 되지는 못했다. “여기 있다가는 딱 이렇게만 살 수 있지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19살의 최 대표는 과감히 사표를 썼다. 이후 군 입대를 하면서, 배관기사로서 어떤 삶을 꿈꾸고 이루어 낼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 했다.


군 제대 후, 조선 기자재 배관 기술에 눈을 뜨게 되다.

최금식 대표는 경남 김해 출신으로 국립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배관과에 입학했다.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사실 최 대표는 배관이 뭔지 기능인의 삶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군 제대 후 현대중공업(주)에 재취업한 최 대표는 조선 기자재 배관 부분에 눈을 뜨게 된다. 최 대표는 이때부터 기능인으로의 삶이 새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면, 일이 좋아지고 열정이 생깁니다. 그렇게 ‘배관’이 제 삶의 전부가 됐습니다.”
사실 기능이 뭔지도 잘 모른 채, 그냥 국립고등학교여서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최금식 대표. 학교에 입학하고 배관기술을 익혔지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보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졸업 후에 현대중공업(주)에 들어가 조선 기자재 배관 부분을 맡아 일을 시작 하게 됐고, 실무에 뛰어든 후부터 자신이 그동안 배관 산업분야에 있으면서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잠을 줄이며 도면을 보는 것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다시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혼자만의 독학 시간 속에 배관 기술이 점점 재미있어 지고, 일이 좋아 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열정이 생기게 되고, 남들보다 늘 한발 앞서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 했다. 이러한 최 대표의 노력과 사유(思惟)의 시간을 통한 ‘배관기술’은 그의 삶의 전부가 되어갔다.

도면도 볼 줄 몰랐던 열등생에서 도면 읽기의 달인이 되기까지!

군을 전역하고, 취업을 하게 된 현대중공업(주)의 배관기사.
처음 접하게 되는 일이 ‘조선용 배관’ 일이었다. 이미 졸업을 한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고, 일반 배관기사 일을 했던 최 대표는 조선용 배관이 뭔지 잘 몰랐다. 하루에 수 십장의 도면을 보면서 배관 일을 해야 했던 그 당시, 그는 도면을 잘 읽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도면을 볼 수 없으면, 다음일로 진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게 됐다. 최 대표는 바로 후배들을 수배 하여 도면 읽는 것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기 시작 했다. “밤새 도면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고, 몇 개월이 흐른 후에는 도면 읽기의 달인으로 변해 있었어요.” 최 대표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공부 했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 대표는 그 당시의 역경을 견뎌 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선보공업(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 기자재 부문의 전반적인 업무를 시작하면서 열린 새로운 인생, 그리고 자부심

‘배관기술’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특히, 일반 건물의 건축배관이 아닌 조선 의장 부분인 ‘조선용 배관’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 지금의 그를 만든 계기가 되었다. 조선소에서 일을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그는 잠을 줄여 가며 조선 의장의 전반적인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 하였다. 10여 년간 현대중공업(주)과 대우중공업(주)에서 근무 한 최 대표는 점점 자신이 맡은 ‘배관’ 부분의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안정적으로 사는 온실 속 화초가 되어 매너리즘에 빠지느니, 황무지에서 스스로의 발로 생존력을 키우겠습니다.”

오래 있으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서 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최 대표. 안정적으로 살면서 온실 속 화초가 되느니 차라리 황무지에서 아무 보호 안 받고 내 스스로 살아보는 것이 나 자신을 더 강하게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창업을 결심한 그는 500만원의 자본으로 동료와 함께 (주)남영공업을 설립한다. 1986년, 그의 나이 만 33살이었다. (주)남영공업은 최 대표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선박엔진 소음기와 여과기 조선용 패키지 유닛의 제작 등에 매진하며 건실한 중소기업체로 성장해나갔다.

기존 생산 공정에 대한 타개책을 모색,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조선 기자재 부분 사업은 모든 작업이 선박위에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파이프를 하나하나 연결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정이 까다롭고, 일은 더디게 진행이 되었다. 그 공정 시간을 단축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최 대표는 묵묵히 조선 전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또 생각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선박사업의 의장품 모듈 유닛화 성공으로 국산화와 함께 생산성 향상에 기여

그런 그의 사유의 시간을 통한 도전은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된다. 1995년엔 현대중공업(주), 대우조선해양(주), 삼성중공업(주)의 1차 협력업체로 등록된 후, 본격적으로 모듈 유닛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기에 이른다. 모듈 유닛화 성공은 세계 최초의 선박 의장품이었다. 조선 선박의장품의 가능성을 본 그는 모듈 유닛 개발에 성공 하게 되고, 그 이후의 개발품들은 모듈 유닛을 기초로 하여 처음 작업 보다는 쉬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사업 초기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의 개발품은 조선 선박사업에 있어서 생산성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기자재는 수입해서 쓸 수도 있지만, 인재는 자력으로 양성할 수밖에 없기에 인재 양성에 힘을 쓰는 최금식 대표.

그의 성공의 원동력은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 된다. 그리고 생각을 실현 시키는 원동력은 바로 기능인으로서의 후배 양성과 인재 육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자재는 수입해서 쓸 수도 있지만, 인재는 양성해서 육성 할 수밖에 없다는 최 대표. 이제 자신의 도전은 인재 양성을 통해 해양 플랜트 산업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라고 새로운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 실정상 조선 기자재 및 해양 플랜트 사업 부분은 거의 수입에 의존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 대표는 조선 기자재와 달리 인재는 자국에서 육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공업계 고등학교와 직업학교의 활성화, 산학 간에 MOU를 통한 고용 창출 활성화를 위해 사회적 지원이 필요 생각한다는 최금식 대표. 그래서 그는 현재 부산기계공고와 자매결연을 통해 장학금 지원, 실습장비 지원, 졸업생중 구직 희망자 우선 채용을 실시하여 지역 인적 자원개발 및 적극적인 고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