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호 : 73호
업종 : 전기
주 생상품 : 전력변환장치, 비접촉전원공급장치
사업장 규모 : 상시 근로자수(43명), 매출액(75억원)
회사주소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모시리 297
홈페이지 : http://sess21.co.kr/
경북대학교 생물기계 박사 졸업 (’07)
경북대학교 생물기계 공학 석사 졸업(00)
경일대학교 전기공학 학사 졸업(85)
경주공업고등학교 전기학과 졸업(81)
(주)세스
○ 특허, 실용실안 취득 및 국제규격 ISO 인증 등
제10-0921442호 “허니콤 타입의 냉각수단을 구비한 콤팩트 타입의 잉곳 제조장치”(단독)
제10-0936865호 “경동장치를 구비한 금속주조장치 및 주조방법(단독)
제10-0952904호 “2단계 고주파 부양용해를 이용한 진공주조장치 및 주조방법”(단독)
제10-0959041호 “자기부상 이송장치의 전자석”(공동)
제10-0985159호 “흡인식 모형 자기 부상 열차 장치(공동)
제10-0985162호 “자기 부상 열차 장치”(공동)
제10-1064441호 “표시장치의 글래스와 패널 분리기”(단독)
제10-1104476호 “비접촉 전원 공급 장치”(단독)
제10-1109926호 “입수방향전환 블레이드를 가진 부유식 수력발전장치”(단독)
제10-1137821호 “슬라이딩 블레이드를 가진 부유식 수력발전장치”(단독)
- ‘85. . ~ ‘86. 포스콘 / 사원
- ‘00. . ~ ’07. 경북대학/ 생물산업공학 강사
- ‘90.10. ~ ’현재 (주)세스 /대표이사
- ‘11.09. ~ ’12.08 초광역 클러스터 구축사업/총괄 수행 책임자
○ 자격취득 및 기능경기 입상실적
- 전기공사산업기사(1984.12.17), 전기산업기사(1985.12.23)
우리나라 반도체의 기술력은 최고 수준이다. 대기업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함께 최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 성장의 중심에서 기술을 인정받는 (주)세스의 김차현 대표가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일흔 세 번째 이 달의 기능한국인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다사리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김차현 대표가 6학년이 되던 해였고, 처음으로 만난 전기와의 인연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한다. 3남1녀의 막내로 자란 김 대표는 호기심 많은 동네 개구쟁이였다. 궁금한 것은 꼭 직접 해 봐야 직성이 풀렸던 어린 시절, 그에게 전기는 무한한 탐구의 대상이었다.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의 전기에 대한 관심은 주변의 모든 전자제품으로 옮겨갔고, 궁금하면 열어보고 풀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동네에서 이름난 사고뭉치였지만, 몸으로 전기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익혔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어느새 온 동네 가전제품을 수리해 주는 ‘동네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중학교에서는 '기술' 과목 수업이 있었는데, 김 대표는 '기술' 수업을 참 좋아했다고 한다. 직접 진공관 전축을 만들고 트랜지스터를 접하면서 전기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도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전기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전기과는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했던 당시 김 대표는 이미 전기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갖추었고, 다양한 실습경험까지 갖추고 있었던 특출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김천수 선생님(현 경주공고 교장)과의 만남은 전기에 대한 공부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그동안 약전(낮은 전력)쪽으로 관심과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던 그에게 고전압 송배전 분야에 대한 공부를 권유한 분이 바로 김천수 선생님이었다. 전력에 대한 또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던 김 대표는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고, 약전은 물론 고전압의 이론적, 기술적 기초를 탄탄하게 익혔다. 이것이 지금의 전력변환장치 전문가로서의 기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린 시절 막연히 에디슨의 전기를 읽고 발명가를 꿈꾸었고, 테슬러의 전기를 읽으면서 ‘전기에 관한 박사’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졌지만 고등학교 졸업 당시의 집안 형편으로는 대학 진학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 대표는 석굴암 전기기사 보조로 사회 첫 발을 디뎠다. 석굴암에서 석굴암 냉동 공조와 TV 공청 시설을 관리‧ 수리하는 일을 맡았다. 평소 관심 있던 분야인 ‘전기’였지만, 더 많은 기능을 익히고 싶었고 더 깊이 있는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 진로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한 김 대표는 결국 대구 영진전문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이 때는 장학금을 받아 학업은 이어갈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대학시절, 우연히 교수님의 도움으로 논리 회로 설계를 하면서 김 대표는 기술력을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자동차 운전면허학원에는 자동채점기가 있었는데, 대부분 수입제품이라 가격이 매우 비쌌다. 이를 개발할 수 없겠냐는 운전면허학원 원장의 요청으로 논리 회로를 설계했고, 부품을 사서 만들어 적용을 해 보니 문제없이 잘 작동이 되었다. 이후 저렴하게 자동채점기를 구비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운전면허학원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 당시 1대 당 100만원의 사례를 받고 만들어 주었으니 대학생의 아르바이트 치고는 꽤 많은 금액이었다. 바로 ‘전문 기술’의 힘이었다. 좀 더 깊이 있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이론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김 대표는 전문대 졸업과 동시에 경일대학교로 편입을 했다. 하지만 편입 직후 군대를 가게 되었고, 제대를 하면서 포스콘(현 포스코ICT)의 전기 기사로 입사를 했다.
“1년 반 포스콘에서의 생활은 한마디로 ‘전기에 대한 전문 기술과 이론에 대한 갈증을 증폭시킨 시절’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주어지는 일은 단순했고, 더 큰 꿈을 꾸기에는 주어진 환경의 벽이 너무나 높았지요. 반면, 현장에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습니다.”
이에 김 대표는 마치지 못한 대학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와 남은 학기를 마쳤다. 현장에서 느낀 부족함 덕분에 더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게 당연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대로 또는 일반적으로 이어지는 학업의 단계로 흘러온 시간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가진 기술에 대한 고민과 발전을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렇게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현장에서 익힌 경험이 지금 제가 가진 기술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김 대표는 대학을 졸업하고는 유학을 가고 싶었다고 한다. 군 제대 당시 그가 독학으로 접했던 ‘G80 마이크로프로세서’ 때문이었다. CPU(중앙처리장치)를 쓰게 되면 기계의 부피가 20분의 1로 줄어들어 버리니 그야말로 ‘기가 찬’ 기술 이었던 것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미국 유학의 길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유학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던 탓에 돈을 먼저 벌어야 했다. 누나에게 500만원을 빌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했으나 개인이 일을 하다 보니 일을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결국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내 기술력을 인정받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90년 1월, 결혼과 동시에 ‘대한시스템’을 설립, 생활가전의 컨트롤러를 제조‧공급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의 탄탄한 기술력과 그 간의 경험은 제품의 완성도를 높였고, 회사는 안정된 성장을 거듭했다. 1993년 대구 앞산의 케이블카 공사를 대기업이 아닌 김 대표가 맡을 수 있었던 것도 김 대표의 기술에 대한 외부의 인정 때문이었다. 김 대표는 직류모터와 PLC(전력선통신)로 완전 자동화된 케이블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둔산 케이블카 담당자가 찾아와 구축한지 1년 된 대둔산케이블카가 고장이 잦다며 전면 교체를 부탁했다. 1993년 김 대표가 직접 시공한 대둔산 케이블카는 10년 동안 잔 고장 없이 운행이 되었고, 10년 뒤 2003년 다시 시공을 해 지금까지 안전하게 운행이 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김 대표는 매년 대둔산 케이블카의 창립기념일에 초청을 받아 방문을 하고 있다.
“1990년 대한시스템 시절부터 지금까지 23년째 저의 클라이언트로 관계를 유지해 오는 기업이 많습니다. 이 클라이언트들이 저의 재산입니다. 제 기술력을 믿고, 저를 믿어주고 있어 회사가 어려울 때도 또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회사를 지탱하며 키워가는 힘이 됩니다.”
1990년 대한시스템으로 시작한 기업은 1992년 (주)우성기전((주)세스의 전신)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성장을 거듭했고, 여전히 김 대표의 일상은 공부의 연속이었다. 전력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부터 궁금한 것은 꼭 해결해야 했고, 새로운 것은 꼭 경험해보아야 직성이 풀렸던 터라, 현장이 곧 그의 학교였다. 비록 유학의 꿈은 접었지만 CDMA(코드분할다중접속)와 RF(무전 주파수) 고주파 영역까지 독학으로 익혔다. 하지만 전기와 전자영역의 기술을 섭렵하며 야심차게 준비한 CDMA 장비의 개발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외환위기의 거센 파도가 (주)우성기전을 덮쳤고, 회사는 한 순간에 휘청거렸다. 대기업의 부도로 중소기업의 연쇄 부도가 도미노처럼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연구개발로 투자한 시간과 돈이 물거품이 된 것은 물론 함께한 직원들도 떠나보내야 했고, 가족의 보금자리마저 위태로웠습니다. 기술 하나만으로 일구어온 회사가 사라질 것 같았던 그 시절은 정말 매 순간 먹을거리 걱정을 해야 했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견뎌야 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남은 직원들과 대구 유통단지에 위치한 두 칸의 사무실에서 다시 시작을 했다. 창업초기부터 김 대표의 기술을 믿어 준 거래처를 바탕으로 다시 기반을 마련해 가던 2000년, 에스에프에이의 배효점 대표이사가 김 대표를 찾아왔다. LCD(액정디스플레이) 제조장비의 전원을 개발하지 못해 7년째 제품개발이 답보상태에 있으니 이를 한번 개발해 보라는 제안이었다. 직원들은 보두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전기연구소에서 7년 동안 연구를 했지만 완성할 수 없었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가능하다’고 판단, 개발을 시작했고 3개월 만에 문제를 해결, 개발을 완료했다. 이것이 바로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이다.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는 자기(磁氣)유도에 의해 비접촉으로 전원을 연결하는 장치로 반도체 제조공정에 안전하게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남들보다 짧은 기간 동안 기술개발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기술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전기와 전자분야의 다양한 경험과 이론적인 기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의 연마, 그리고 이와 연관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가 바탕이 되어 기술개발의 기간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전기에 대한 호기심이 트랜지스터로, 이것이 논리 회로로, 그리고 CPU로 또 DSP(디지털신호처리)로 이어지면서 전기와 전자분야의 한 세대를 섭렵해 온 그의 관심과 노력이 기술개발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2000년 개발된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는 매년 업그레이드되어 아직도 (주)세스의 주력제품으로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1997년 IMF 당시 제가 CDMA 장비를 개발할 때 기술보증기금에서 5천만 원을 지원을 받았었습니다. 2000년 당시는 지원금을 상환해야하는 시점이었는데, 그때 제가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를 개발하고 있었거든요. 그걸 본 기술보증기금 담당자가 다시 5천만 원을 지원해 주더군요. 개발이 끝나고 지금까지 누적 매출이 500억 원입니다. 5천만 원이 500억 원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기술의 힘입니다.”
그동안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는 B to B(기업과 기업 간에 이루어 지는 거래)의 형태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기반시설에 적용되어 왔다. 하지만 반도체 공정뿐만 아니라, 교통 및 의료분야 등 여러 분야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으며, 일반 소비자를 위한 시장도 곧 열릴 것으로 전망되어 앞으로 더 큰 성장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의 기술로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 개발에 도전했던 것도 기술력을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 개발 초기 에스에프에이는 매출의 100억도 되지 않는 중소기업이었습니다. 그 기업이 지금은 매출 1조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산업이 커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2007년 (주)우성기전은 반도체산업의 핵심도신인 창원으로 본사를 옮기고 (주)세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시장대응력을 높이기 위함이자 동시에 ‘전자유도를 이용한 비접촉 전원장치’에 버금가는 새로운 영역의 확장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그럴듯한 좌우명 하나 없이 달려왔습니다만 아직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꿈이 있다면 제가 만든 제품이 전 세계로 가서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GE의 브랜드를 넘어서는 기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